9.28 서울 수복 76주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다섯 가지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다시 우리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된 지 석 달 만의 일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중앙청 태극기 게양을 떠올리지만, 그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서울이 네 번 주인을 바꿔야 했던 아픈 역사를 함께 봐야 합니다. 아래 표에 9.28 서울 수복의 큰 흐름을 정리했습니다.

날짜사건
1950년 6월 28일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함
1950년 9월 15일인천상륙작전 성공
1950년 9월 27일중앙청에 태극기 게양
1950년 9월 28일서울 수복
1951년 1월 4일서울 재점령
1951년 3월 14일과 15일최종 수복

서울은 네 번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서울은 한국전쟁 동안 무려 네 번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 점령됐고, 같은 해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이 되찾았습니다. 그런데 1951년 1월 4일 다시 서울을 떠나야 했고, 두 달 뒤인 3월 14일과 15일에 최종 수복했습니다. 9.28 서울 수복은 두 번째 수복이라는 점에서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승리의 환호가 석 달 만에 다시 위기로 바뀌는 과정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순으로 보면 더 선명해집니다.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9월 20일과 21일 영등포 전투,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서울 외곽 돌파, 9월 26일과 27일 시가전, 9월 27일 밤 서울 일대의 북한군 후퇴, 9월 29일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원수의 환도식 순서였습니다. 인천에 상륙하고 서울에 닿기까지 열흘이 걸렸습니다.

9.28 서울 수복

중앙청 태극기는 9월 27일 새벽에 올랐습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기념일은 9월 28일이지만 태극기가 중앙청 옥상에 오른 날은 하루 빠른 9월 27일이었습니다.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해병대 박정모 소위와 대원들이 인공기를 내리고 태극기를 걸었습니다. 기념일이 28일인 이유는 그날 밤 서울 일대의 북한군이 완전히 물러나며 작전이 끝났기 때문입니다. 한 장의 태극기 뒤에도 정확한 날짜 계산이 필요할 만큼 치열한 상황이었습니다.

한강인도교 폭파와 희생자들

서울 수복의 이면에는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30분 무렵, 한강 인도교가 폭파됐습니다.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당시 다리 위에는 수많은 피란민이 있었습니다. 다리 위에 4천 명 이상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합니다. 희생자는 최소 500명에서 800명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집계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2020년 6월 28일, 사건 70년 만에 한강대교 노들섬 남쪽 둔치에 위령비가 세워졌습니다.

최창식 대령과 14년 만의 무죄

폭파를 집행한 사람은 육군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었습니다. 지시는 채병덕 육군 총참모장이 내렸습니다. 군은 1950년 9월 21일 최창식 대령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같은 날 집행했습니다. 그의 처형 일주일 뒤가 9월 28일이었습니다. 이후 부인 옥정애 씨가 재심을 청구했고, 1964년 11월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폭파 자체가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고, 집행자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돌릴 수 없다는 판단이었습니다. 명령을 내린 채병덕 총참모장은 이미 1950년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한 뒤였습니다.

서울을 되찾은 뒤 다시 찾아온 시련

9.28 서울 수복 이후 전선은 북쪽으로 올라갔습니다. 1950년 10월 1일 국군이 38선을 넘었고, 이 날짜가 국군의 날이 된 이유입니다. 건군일도 창설일도 아닌 날짜를 기념일로 정한 것은 바로 이날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해 겨울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전선이 다시 내려왔고, 1951년 1월 4일 서울에서 철수해야 했습니다. 두 달 뒤인 3월 14일과 15일 서울을 다시 되찾았고, 그 뒤로는 주인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 과정을 보면 9.28 수복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연약한 성취였는지 느껴집니다.

76주년 기념식을 바라보며

지난 9월 19일 서울시청광장에서는 제76주년 서울수복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행사에 직접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기념식 사진과 소식을 보며 그날의 무게를 다시 느꼈습니다. 특히 해병대 예비역들이 이 날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는지가 전해졌습니다. 전국 450여 개 해병대전우회 회원들은 지역사회 봉사활동도 이어가며 기억을 지키고 있습니다. 서울수복이 없었다면 오늘의 서울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텐데, 역사 앞에서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기억을 이어가는 작은 습관

역사는 한 번에 거대하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매년 9월이면 관련 기록을 찾아보고, 한강대교 위령비나 전쟁기념관을 찾아 그날을 떠올리려 합니다. 자녀에게도 9월 28일이 어떤 날인지 짧게라도 이야기해 주려고 합니다. 직접 보고 듣는 경험이 책에서 읽는 것보다 오래 남기 때문입니다. 기념일이 지나고 나서도 그날의 의미를 곱씹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9.28 서울 수복이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

9.28 서울 수복은 군사적 승리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수도가 돌아오면서 정부 기능이 다시 살아났고, 국민에게는 희망이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같은 해 겨울 다시 서울을 떠나야 했던 경험은 승리가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이 역사를 기억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의 평화와 자유가 얼마나 많은 희생 위에 서 있는지를 되새기기 위해서입니다. 앞으로도 9.28 서울 수복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기념식에 더 많은 관심이 모이는 문화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가 지키고 물려줘야 할 가치가 더욱 선명해질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9.28 서울 수복과 인천상륙작전은 어떤 관계인가요?

A: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로 진격해 9월 28일 수복했습니다. 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서울 수복이 더 늦어졌을 것입니다.

Q: 중앙청 태극기는 왜 9월 27일에 올라갔나요?

A: 1950년 9월 27일 새벽 6시 10분 해병대 박정모 소위와 대원들이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걸었습니다. 9월 28일은 서울 일대의 북한군이 완전히 물러나 작전이 끝난 날입니다.

Q: 한강인도교 폭파의 책임자는 누구인가요?

A: 폭파를 집행한 최창식 대령은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1964년 11월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습니다. 폭파를 지시한 채병덕 총참모장은 1950년 7월 전사했습니다.

이 포스팅은 쿠팡 파트너스 활동의 일환으로, 이에 따른 일정액의 수수료를 제공받습니다.

Leave a Comment